일상기록 191230

내가 요즘 SNS상에서 일상적으로 포스팅을 체크하는 사람들이 몇 있는데, 대표적으로 황교익, 윤서인, 김윾머, 신준경이 있다. 이 넷은 나름 한국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고, 그래서 이들이 올리는 글들이나 그 글들에 대한 반응들을 보고 있으면 한국 일반 대중의 사고 흐름을 대략적이나마 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매일 한 차례 정도씩은 둘러보고 있는 편이다.

물론 뭔가 배우려는 목적으로 들여다보는 이들은 따로 있고, 이들에게선 단 1도 그런 목적이 없다. 정말 형편들이 없는데, 그래도 들여다 보는 이유는 이들이 한국인들의 평균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각자가 스스로의 세계를 설계하고 만들어 갈 능력도 의지도 관심도 없이 성장을 하다가 어른이 되어버린 사람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사회에서 ‘집단’은 곧 ‘자아’다. 내가 속한 집단을 통해 스스로를 규정할 수 밖에 없다는 얘기다.

각자 흥미나 관심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이는 건 자연스러운 사회 활동이지만, 한국 사회의 패거리 문화가 부자연스러운 이유는 그 순서마저도 뒤바뀌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특정 집단이나 부류에 들어가기 위해 흥미나 관심을 만든다는 얘기다.

애초에 집착하고자 할 만한 대상도 많지 않고, 어린 시절부터 오로지 금전적 성공만을 목표로 삼느라 거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 흥미나 관심은 가능한 외면하거나 뒤로 미뤄온 채 살아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스스로를 규정하기 위해 자신이 맘에 드는 ‘남’을 골라 그를 추종함으로써 자신을 그려가는 사람들이 다수인 사회란 거고, 앞서 언급한 네 명이나 그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은 자아를 설정하려는 사람들에게 적당히 차별화 된 아이덴티티를 제공해주는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 중에 메시지가 아닌 메신저를 공격한다는 얘기가 있는데, 이것도 자연스레 설명이 된다. 평소에 메시지에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에 내 아이덴티티를 남을 통해 설정할 수 있는 거니까.

우파니 좌파니 하는 것 역시 대부분 인물 기준이다. 누구를 좋아하면 우파, 싫어하면 좌파. 스스로를 규정하는 집단을 선택할 때부터 메신저를 보는 사람들이 메시지를 놓고 따질 수 있는 능력이 있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요즘 소위 극우 유튜버들의 채널에 들어가보면 ‘반중친미’라는 말이 심심찮게 보인다. 마치 자신의 정치적 스탠스를 상징하는 선언처럼 쓰이는데, 이 말이 한심하고 안 하고를 떠나, 난 이게 한국의 평균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슨 ‘응징’ 어쩌구 하던 놈이나 틈만 나면 ‘반중친미’를 하냐고 묻고 다니는 놈이나… 그냥 단순히 심심해서 돌아다니다 댓글이나 남기는 그런 수준이 아닌 사람들이 너무 많다. 따지고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정도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한국은 뭐든 쉽게 종교화가 되는 거라고도 본다. 종교의 갯수는 일본이 훨씬 많지만, 광신도는 한국이 훨씬 많다. 한국은 종교가 아닌 대상도 종교화 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당연히 자아, 즉 스스로의 아이덴티티를 갖는 건 매우 중요하고 어려운 일인 건 틀림없다. 근데, 그 중요한 걸 나 스스로 만들기 보다는 간단히 외부의 이미지에 의존하려고 하다보니 자신이 눈이 먼 지도 모른 채 맹목적인 추종을 하는 수 밖에 없는 게 아닐까. 열심히 따를 수록 내 자아가 완성되어 가는 느낌이 들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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