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 2월, 2019

헛발질

약 10년 전에 직장에서 만났던 사람이 있다. 처음 만난 날 집 쪽으로 같이 지하철을 타고 오면서 친해졌다가 내가 오너와 싸운 뒤 때려치고 나온 뒤로도 한동안 계속 보고 하다가 점점 소원해지는 느낌이 들다가 어느날 어떤 계기로 굳이 불편하면 연락할 필요 없다고 연락을 보내고 관계를 정리했던 과거가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요즘 유튜브에 미니멀 라이프에 관한 영상을 올리고 있는데, 꽤 반응이 좋아서 그런지 얼마 전 내 추천 영상 리스트에도 올라왔길래 보게 되었다. 아무리 관계를 정리했지만, 그래도 근 10년 만에 얼굴을 보니 반갑기도 하고 해서 잠깐씩 보았는데, 아마 전화기로 보다가 구독을 누른 듯 했다.

그래서 그랬는지 요즘 유튜브를 들어가면 그의 영상이 더 많이 올라오는데, 오늘 제목이 인간 관계에 관한 거라 처음부터 차분하게 영상을 시청했다. 그는 영상에서 예전엔 그도 넓은 인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고 했는데, 그 시절이 아마 나와 관계를 맺고 있던 시절이었을 거라 생각이 들었다. 당시 그는 홍대 인디 밴드 씬에서 엄청 많은 이들을 알고 있었고, 언제나 자랑삼아 얘기하곤 했다. 실제로 그는 많은 이들을 알고 있었고, 많은 이들도 그를 알고 있었다. 여튼 그런 시절에 이미 그와의 관계를 아무렇지 않게 정리해버린 나에게 그가 지금 영상에서 말하는 내용들이 크게 와 닿을 리 없었다.

내가 아는 한 그는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한 게 아니고, 미니멀 라이프가 아닌 다른 라이프를 선택할 여지가 없었던 걸로 보인다. 다시 말해 선택을 한 게 아니고, 선택을 당한 것이다. 그래서 그가 ‘주관적 생각’이라고 쉴드를 치며 전개하는 그의 주장은 뭐랄까 다분히 억지스럽다는 느낌이 든다.

다 보진 않았지만, 몇 개 볼 때마다 나오는 게 ‘난 지금 행복하다’는 식의 표현인데, 미니멀리스트라 행복한 게 아니라, 행복하기 위해 미니멀리스트가 된 느낌이랄까. 쉽게 말해 자동차를 살 수 없으니 자동차가 싫다고 하다가 자동차가 없으니 오히려 아주 편해요…라고 하는 느낌. 더 쉽게 말해서 나도 니네 못지 않아… 느낌.

다른 영상에서 크레딧 카드가 없으니 갚을 걱정 안 해도 된다고 하는 장면도 보았는데, 크레딧 카드가 있다고 누구나 그 걱정을 하는 건 아니다. 정말 편하게 매달 카드 대금을 결제하거나 카드를 가지고도 계획적이고 낭비 없는 삶을 살아본 경험이 있는 자들은 그렇게 간단히 얘기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에겐 카드 대금 결제가 언제나 힘들었던 기억만 있었을 거란 추측이 어렵지 않다.

어쨌든 전반적으로 그의 주장들은 설익은 과일 맛이라 자꾸 유튜브 추천영상 리스트에 올라와도 그냥 그의 근황을 확인하는 선에서만 슬쩍 슬쩍 보고 지나가다 오늘은 왠지 흔적을 남기고 싶어져서 코멘트를 몇 줄 남겼었다. 과연 반응을 할까… 하는 궁금증도 생기고…

처음엔 괜히 쿨한 척 하고 싶어서 오늘 처음 본 거처럼, 그리고 구독이 이미 된 상태인 줄도 모르고 구독은 안 할 거지만, 화이팅 하라며 거들먹 거렸다가, 구독 단추가 눌러져 있는 걸 보고 재차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지만, 결국 8시간 만에 반응도 없고 해서 지워 버렸다. 지우고 나니, 무슨 미련이 남아 있었던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난 딱히 미래만을 보고 나아가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과거에 얽매이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데, 일본에 와서부턴 지금까지의 실패나 실수에 대한 아쉬움들이 새록 새록 떠올라 마음을 짓누를 때가 많다. 아무래도 일본에서의 시작은 어쩌면 마지막 재도약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가능한 신중하려고 해서 그런 걸까.

할 수 있다면 완전히 기억에서 지워 버리고 싶을 만큼 마주치고 싶지 않은 과거들이지만, 뭐 할 수 없이 마음 한 켠에 쌓아두는 수 밖에. 차라리 기왕 쌓는 거 제대로 쌓아 도약을 위한 발판으로 삼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너무 촌스런 전개이고…

어쨌든 미련 땜에 휘두른 헛발질은 뒷맛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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