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와 [énɚdʒi]와 エネルギー

어제 회식을 하고 온 아내는 오늘 피곤하다며 평소보다 조금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나도 운전을 좀 해서 피곤한 김에 같이 잘까 했지만, 역시 좀 이른 시간이라 일단 다시 컴퓨터 앞으로 왔다. ㅋ 

와서 이런 저런 글을 읽다가 일본’애’들은 에너지 발음이 안 되어 에네르기라고 한다는 표현을 보게 되었다. 뭐 그런 표현을 처음 보는 건 아니지만, 요즘 다시 발음교정 연구회 강좌를 하려고 준비하고 있어서 그런가, 그냥 넘어가지질 않았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일본인들이 [énɚdʒi]를 에네르기라고 발음을 하는 이유는 발음이 안 되어서가 아니고, 그들이 갖고 있는 문자 체계로 표현을 할 수 있는 최대치가 에네르기(エネルギー)이기 때문에 그렇게 읽는 것 뿐이다.

또 하나의 결론. 에너지는 [énɚdʒi]일까? 당연히 아니다. 에너지는 [énɚdʒi]를 한국어 소통에 적합하도록 한글을 이용해 표현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대로 읽으면 역시 [énɚdʒi]와는 틀린 소리가 난다. 둘 다 [énɚdʒi]가 아닌 건 마찬가지.

소리를 내는 것과 그 소리를 문자라는 틀을 이용해 표현하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얘기다.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인종 간에 성대의 갯수나 모양이 다르다면 모를까, 고작 문화적 구분일 뿐인 ‘민족’이 다르다고 낼 수 있는 소리들이 달라진다는 건 정말 무식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소리를 만들어내는 기관의 모양이 비슷하다면 낼 수있는 소리의 범위도 비슷해진다. 다시 ‘에너지’로 돌아가서… 미국인이든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énɚdʒi]라는 소리를 내는 건 모두 가능하다. 다만, 오랜 동안 그런 소리를 안 내던 인간들이라면 ,소리를 내는 것도 근육의 작용이라 잘 쓰지 않는 근육들을 잘 쓰지 않던 방식으로 쓰고 해야 하니 번거롭고 어색할 뿐이지 절대 불가능하지 않다. 

근데, 그걸 각자 자기들이 가진 문자 체계를 이용해서 구체적인 소리를 추상화 해버리면 그 때부터 소통의 근간은 소리가 아닌 문자, 즉 추상화된 소리가 되어버리고, 소리는 철저히 문자의 지배 혹은 영향을 받게 된다. 일본인들이 [énɚdʒi]라는 소리를 낼 줄 몰라서 에네르기라고 하는 게 아니고, 그들이 사용하는 문자 체계로는 エネルギー라고 쓸 수 밖에 없으니 그렇게 읽는 습관이 생겼다는 것이다.

한글이 다양한 소리들을 표현하는 데에 확실히 그 기능이 뛰어나지만, 그렇다고 모든 소리를 그대로 표현해주진 못한다. 우리가 흔히 번데기 발음이라고 하는 [θ]소리도 그렇고, 일본어의 つ를 정확히 표현할 방법도 한글엔 없다. 썬더볼트도 츠키지도 쓴대로 읽으면 모두 틀린 발음이다. 한글로 표현할 수 있는 최대치이지만, 그대로 읽으면 한국’애’들은 도대체 이 발음들을 왜 제대로 못 하느냐는 소리를 들을 수 밖에 없다.

언어는 능력을 자랑하는 도구가 아니라 역내 사람들의 소통을 위한 약속일 뿐이다. 약속은 그 약속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서로 틀림이 없으면 된다. 에네르기라고 하던 뭐라고 하던 같기만 하면 상관없다는 뜻이다. 한국에서도 누구는 에너지라고 하고 누구는 이너기라고 하면 문제가 생기지만, 뭐라고 하든 하나로 통일이 되면 굳이 미국인이나 미국에서 나고 자란 코리안 어메리칸처럼  [énɚdʒi]라고 소리를 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한글로 표현한 발음이 좀 더 영어에 가까우니까 더 잘 나고 앞서 나가는 거처럼 느끼는 치기어린 자존감 자체를 뭐라 할 생각은 없다. 한글이 문자 체계로써 그 기능이 우수한 것도 인정하겠지만, 그 우수한 글자과 발음을 가지고 형편없는 글자와 한심한 발음을 가진 ‘애’들의 사회보다 뭐 하나 우수한 게 없는 사정은 뭘로 설명할 건지 그게 궁금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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